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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제 소서노와 하북위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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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교육/건강

여황제 소서노와 하북위례성

3. 노철산(老鐵山)의 횃불

 

등주항의 새벽은 어하라 백성들만큼 부산했다. 그들은 썰물 소리와 함께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하라 소서노가 이끄는 100여 개의 대박(大舶)들은 다음 기착지인 대련(大連)을 향해 돛을 올릴 채비를 마친 참이었다. 갑판 위에는 고국을 떠나온 번민을 씻어내고 새로운 땅으로 향한다는 설렘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포구의 삐걱거리는 선창을 가로지르며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등주항의 맹주 설백천(薛白千)이었다. 그의 뒤로는 십여 명의 장정이 따라 뛰어오고 있었다.

출항을 지휘하던 마려가 급히 검자루에 손을 얹었고, 선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만 잠시만..어하라시여, 잠시만 기다려주소서. 아직 출항하지말아주소서.”

선두(船頭)에서 선 소서노는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붉은 망토가 여황제의 위엄을 더했다.

하루 전날 무릎맞춤이 있은 이후 두 사람의 말과 태도는 천양지차로 바뀌어져 있었다.

설 행수, 이미 약조된 철괴(鐵塊)의 대가는 치렀을 텐데, 출항을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이오?”

죄송합니다. 제 말 좀 들어봐주세요.”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그의 눈은 싸움의 눈이 아니었다. 부탁으로 가득한 눈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아무리 단단한 철을 얻은들 그것을 녹이고 두드릴 이 없다면 그저 무거운 돌덩이에 불과하지않습니까? 철 다루는 기술자 한 명이라도 남겨두고 가셔야 마지막까지 도와주시는 게 아닌가 해서요.”

그랬다. 설백천은 소서노로부터 품질 좋은 철괴를 받아들고 기뻐했으나, 잠시 후 밤새 난처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아차? 철을 다룰 불칼지기에 대한 협상을 빠뜨렸구나.’

이 생각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 그는 눈을 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소서노가 떠나기 전, 등주항의 안개를 뚫고 이렇게 찾아와 다급한 부탁을 하는 수 밖에...

설 맹주의 말에 등주항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피부에 파고들었던 긴장감은 한순간에 봄눈 녹듯 사라졌다. 소서노 또한 맑은 웃음으로 설맹주의 부탁에 대답했다.

설 행수, 그 일로 밤새 잠을 못 이루신 듯하군요. 저야 당연히 검은피(黑血)를 다루는 불칼지기가 있는 줄 알았지요.”

저희도 불칼지기가 있긴 합니다만 이렇게 품질 좋은 철괴를 다룰 불칼지기는 없습니다.”

알았소. 설 행수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겠으니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보시오. 누구를 남겨 놓는 게 좋겠습니까?”

소서노의 눈은 상단의 두목 아바치에 꽂혔다.

그러지 않아도 그 전부터 아바치는 머리 속으로 여러 사람을 골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볼 때, 등주항에 남겨둘 돋아비는 저 친구가 제일 좋을 듯 합니다.”

아바치가 결정을 내린 듯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지목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어하라 최고의 젊은 장인, ‘태거(太巨)’가 서 있었다. 태거는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와 숯검정이 묻은 굳건한 얼굴을 가진 사내로, 한 손에는 거대한 야철 망치를 들고 있었다.

저 친구가 좋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거의 모습을 본 소서노는 덩치와 인물을 보아 남겨두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없을까요?”

. 다른 사람들은 가족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만 내려놓고 가기에는 저 친구가 가장 적합합니다.”

아바치의 말을 들은 소서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바치의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알겠소. 그럼 내가 설 행수에게 통보하리다.”

 

마침내 닻이 오르고 대박의 거대한 돛이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등주항을 뒤로한 선단은 이내 푸른 바다의 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시에 그들의 출발을 뒤로하고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돌린 태거의 모습도 등주항의 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배들이 등주 앞바다의 금문군도(金門群島)를 거쳐 갈 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장엄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 그 자체였다. 점점이 흩어진 크고 작은 섬들은 마치 바다 위에 띄워놓은 거대한 수석(壽石) 같았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섬의 절벽마다 붉은 노을빛을 머금은 안개가 비단 자락처럼 감돌았고,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린 낙락장송들은 거센 해풍을 맞으며 푸른 기개를 뽐내고 있었다.

바다는 거울처럼 맑아, 돛배들의 그림자가 수면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가끔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떼의 날갯짓이 고요한 수묵화 같은 풍경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소서노의 선단은, 신선의 정원을 지나는 거대한 용의 행렬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갑판 위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희망찼다.

대박 위에서 생활하는 어하라 부족민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불안이나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갑판 위를 뛰어다니며 금문군도의 아름다운 섬들을 가리켰고, 여인들은 다가올 희망 가득한 어하라 제국을 그리며 밝은 미소로 노래를 불렀다.

선두에 선 소서노는 바람을 맞으며 가슴 가득 퍼지는 희망의 온기를 느꼈다. 대박에 가득 찬 모든 이들의 심장 소리가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발해와 황해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거센 포말을 일으키는 노철산(老鐵山) 앞바다, 이른바 철해(鐵海)’라 불리는 험난한 수도(水道)에 소서노의 대박(大舶)들이 다다랐을 때였다. 키를 잡은 선원들의 손에 땀이 쥐어질 만큼 물길은 사나웠고, 흩날리는 해무는 사방의 분간을 어렵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잿빛 안개를 뚫고 거대한 불기둥들이 웅장하게 솟구쳤다. 노철산의 암벽 절벽마다 층층이 세워진 봉수터에서 일제히 불을 밝힌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조난방지용 불꽃이 아니었다. 거친 바다를 가르고 들어오는 소서노의 선단을 인도하는 거대한 환대의 신호, 이른바 노철산의 횃불세력이 오랫동안 감추어두었던 불씨였다.

이 노철산의 횃불들은 대륙 전체와 요동, 그리고 삼한의 해로를 은밀히 장악하고 있던 거상 백해홍로(白海紅路)’ 상단과 오랜 세월 깊은 가문적 · 경제적 연을 맺어온 이들이었다. 대박의 갑판 위에서 이 장관을 지켜보던 백해홍로 상단의 두목 아바치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서노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하라시여, 보십시오! 노철산의 형제들이 우리의 도착을 미리 알고 길을 열었습니다. 저 횃불은 백해홍로의 깃발이 이 바다에 떠올랐음을 환영하는 신호이자, 어하라를 영접하겠다는 그들의 맹세입니다.”

아바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단의 부두목들이 일제히 지휘봉을 잡고 분주히 움직였다.

노철산의 거친 절벽을 돌아들자, 안개 속에서 거대한 양의 우리를 닮은 천험의 석성, 목양성(牧羊城)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백해홍로의 비밀 기지이자 소풍의 피땀이 서린 그 성문이, 마침내 소서노를 향해 활짝 열렸다. 노철산 횃불 세력과 사전에 약조된 독특한 북소리와 깃발 신호를 주고받으며, 거대한 대박들을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천연 요새인 목양성(牧羊城)아래 포구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접안시켜 낸 것이었다.

수백 년간 대륙의 눈을 피해 이 요충지를 지켜온 노철산의 부두목들과 백해홍로의 노련한 사내들이 보여준 완벽한 협업이었다. 배가 안전하게 정박하자, 노철산의 수장들은 소서노 일족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양과 염소를 잡고 귀한 술을 내어오며 융숭한 잔치를 벌였다. 어하라의 백성들과 노철산의 형제들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횃불 아래서 고기를 뜯고 술을 나누며, 마침내 도래한 안전한 기지에서 한껏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곳 노철산의 철기 장인들과 해상 세력을 이끄는 대두목, 탁발륭(拓跋隆)은 벌써 수일 전부터 백해홍로의 기별을 받고 소서노 일족을 위한 가장 성대하고 융숭한 연회를 준비해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름진 양과 염소 수백 마리가 통째로 숯불 위에서 익어가며 고소하고 진한 기름 냄새를 풍겼고, 대륙 깊은 곳에서 밀무역으로 들여온 귀한 고량주와 포도주가 담긴 거대한 도기 항아리들이 마당 가득 줄을 지었다.

연회장 중앙, 가장 높은 상석에 어하라 소서노가 자리 잡았다. 그녀의 좌우로는 백해홍로의 두목 아바치와 함께, 대륙의 동쪽 바다를 호령하던 상단의 부두목들인 철보국(鐵保國), 장만리(張萬里), 고수량(高守亮)이 호위하듯 동석했다. 이에 맞서 노철산의 대두목 탁발륭의 뒤편으로는, 이곳 요새의 철기 생산과 정예 무사들을 통솔하는 부두목들인 맹각(孟角)과 호바(胡巴)가 굳건한 풍채를 자랑하며 앉아 있었다.

소서노의 진영 역시 격식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의 대업을 좌우에서 보필하는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필두로, 백제의 건국 기틀을 다질 십제(十濟)의 핵심 공신인 해루(解婁), 태천(太泉),성간(成干), 마려(馬黎), 우보(烏干), 범창(范昌)등이 웅장한 가죽 갑주를 갖춰 입고 나란히 자리했다.

북방의 가야금과 대륙의 피리가 섞인 이국적이고도 웅장한 가락이 노철산의 계곡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탁발륭이 자리에서 일어나 꿀을 탄 붉은 술이 가득 담긴 황동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소서노에게 다가갔다.

그의 키는 작았으나 돌멩이처럼 단단한 어깨와 다부진 가슴, 근육질의 팔뚝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덩치가 큰 사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기개의 소유자였다.

목소리 또한 가볍고 투명하였으며, 높으나 날카롭지 않아서 듣는 사람의 심장을 움켜쥐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북방의 차가운 눈바람 속에서 스스로 대국을 일구시고, 이제 삼한의 대지에 새로운 천년을 심기 위해 바다를 건너오신 위대한 어하라시여! 우리 노철산의 모든 형제들이 당신의 발걸음 아래 이 잔을 바치나이다!”

탁발륭이 잔을 올리자, 좌중에 모인 수천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술잔을 부딪쳤다. 꿀술의 달콤함과 고량주의 독한 향이 불꽃의 열기와 섞여 포구 전체를 흥건하고 취기 어린 즐거움으로 가득 채웠다.

술이 몇 차례 돌고 연회의 흥이 극치에 달했을 무렵, 대두목 탁발륭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리에 찬 묵직한 무쇠 검을 철그렁거리며 뽑아 들었다. 그것은 소서노 일족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경외를 표하는 장수의 의식이었다.

어하라시여! 우리 노철산과 백해홍로가 그간 그대들의 거룩한 행로에 무쇠를 벼리고 길을 열며 형제의 의를 맺어온 세월이 결코 짧지 않습니다. 이제 이 바다를 건너시면 언제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술을 나눌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이 장수의 가슴에 서운함과 서글픔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부디 신령한 대지로 가시어 우리 형제들의 철기가 부끄럽지 않을 대국을 세우소서!”

탁발륭의 옹골찬 신형(身形)이 모닥불 빛을 받으며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휘두르는 무쇠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불꽃의 잔상이 검날을 따라 붉은 궤적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 , 하고 대지를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탁발륭은 노철산 장인들의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그 장엄한 몸짓을 보며 백해홍로의 부두목 중 가장 뛰어난 검술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철보국(鐵保國)이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장검을 뽑아 들고 마당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형님! 그 서운한 마음을 어찌 홀로 달래려 하십니까! 백해홍로의 물길이 소서노 어하라의 선단을 소래포구로 인도하는 그날까지, 우리의 기상이 죽지 않았음을 내 이 검으로 보태겠소!”

철보국의 가볍고도 날카로운 장검이 탁발륭의 묵직한 무쇠 검과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쨍! 하는 청아한 금속성을 울렸다. 두 거장의 검무가 화려하게 어우러지자 모닥불의 불씨들이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오랜 세월 대륙과 바다의 위험 속에서 서로의 등 뒤를 지켜주며 살아왔던 동지들의 깊은 연대감, 그리고 이제 이 거대한 정착지를 떠나 삼한의 미지 땅으로 향하는 소서노 세력을 향한 뜨거운 석별의 정이 검날의 매서운 궤적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비류와 온조, 그리고 마려를 비롯한 십제의 신하들은 그 장관을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전율을 느꼈다. 이 이별은 슬픔이 아니었다. 노철산의 형제들이 벼려준 철기와 백해홍로가 다져놓은 자본을 바탕으로, 신라를 넘어서는 거대한 제국을 저 남쪽 대지에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다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불꽃의 맹세였다.

밤은 깊어갔고, 노철산의 불꽃은 도래할 대백제의 찬란한 서막을 축복하듯 멈추지 않고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