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7 (화)
2. 등주항의 맹주(盟主), 설백천(薛白川)
어하라의 상인 집단인 백해홍로(白海鴻路)의 대표 아바치가 입을 열었다.
“순풍입니다. 순풍.”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천문(天文)을 읽어낸다는 갈석산의 은둔자 연경(淵鏡)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번 천도(遷都)로 결정된 삼한(三韓)의 땅으로 가려면 수일이 걸리겠네요?”
아바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한 삼한까지는 하루 이틀에 도착할 거리는 아닙니다.”
연경(淵鏡)은 아바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각 대박에는 배를 아주 잘 다루는 한(韓)씨 부족의 일원들과 등주항로(登州航路)를 여러 번 경험한 상단의 정예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야지요. 아무 경험이 없는 다른 부족 사람들은 많이 두려울 겁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은 어찌 될까요?”
연경의 질문에 아바치가 대답을 한다.
“우리가 첫 번째로 도착할 곳은 등주(蓬萊)입니다. 그곳은 기원전 567년 소래(蘇萊)로 떠난 소풍(蘇豊)집안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죠.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두 번째로는 대련(大連)이라는 곳입니다. 이곳까지 가는 과정에는 바다 한가운데 북두칠성처럼 흩뿌려져 있는 금문군도(金門群島)의 섬들을 징검다리 삼게 될 겁니다. 혹시 모를 해상 사고에 대비한 경로라고 보면 되는 것이죠. 대련에 도착하면 ‘노철산(老鐵山)의 횃불’이라는 단원들이 저희를 맞이해 줄 겁니다. 그들은 그동안 우리 백해홍로(白海鴻路)와 함께해 온 사람들이죠. 아마도 어하라(於瑕羅)님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어하라 소서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서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100여 개의 대박은, 얼음 위를 가볍게 치고 나가는 썰매처럼, 미끄러지듯 파도의 물결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맨 앞의 배의 물살가름에 서 있던 소금코 한세기(韓世奇)가 소리를 질렀다.
“흰불개가 피었다. 흰불개가 피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물살가름 위에 서서 바다 건너 육지의 흰 연기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 흰불개다. 흰불개가 피었다.”
온통 바다는 어하라 백성들이 토해내는 함성소리로 출렁이는 것이었다.
각 배에 탄 부족의 아이들은 배뼈에 연결된 동줄을 잡고 곡예를 하듯 등주의 뭍을 바라보았다. 조백하를 떠난 지 대여섯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벌써 육지가 그리웠던 것일까?
시간은 얼추 저녁을 향해 기울어 가고 배는 서서히 등주(蓬萊)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대박 100여 개가 등주항에 들어서자 항구를 에워싸고 서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알아듣지 못 할 걱정의 목소리가 일렁였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잿빛 바다 위에 서 있는 거대한 불꽃의 잔영으로 물드는 등주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소서노(召西奴)의 함선 백여 척이 마침내 등주항의 안벽에 닻을 내린 것은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황혼 무렵이었던 것이다.
배의 난간을 잡고 이물에 선 소서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등주항의 요새를 등지고 선 수천 명의 무장 군사들과 그 선두에 선 한 사내였다. 그가 바로 등주 일대의 해상권과 군권을 쥐고 흔드는 맹주(盟主), 설백천(薛白川)이었다.
설백천은 한눈에 보아도 바다의 풍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란 장수였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나, 북방의 곰처럼 웅장한 체구에 해풍에 검게 그을린 구리빛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매부리코 아래로 굳게 다문 입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왼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깊은 검흔(劍痕)은 그가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음을 증명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바다를 닮은 그의 가늘고 긴 눈은, 상대를 꿰뚫어 볼 듯한 냉철함과 동시에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지녀야 할 깊은 노련함을 담고 있었다. 그는 화려한 비단 옷 대신, 소금기 서린 묵직한 가죽 갑옷 위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등주항을 지키는 거대한 암벽과도 같았다.
"발해의 물길을 가르고 온 소서노 어하라여, 이 황혼의 시간에 1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 땅에 닻을 내린 이유가 무엇인가? 등주를 피로 물들이겠다는 선전포고인가?“
설백천은 소서노의 배에 높이 솟아 있는 백해홍로의 깃발을 발견하고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담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설백천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소서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의 매서운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1만 명에 달하는 어하라(於瑕羅)의 백성과 군사가 돌연 전함을 이끌고 입항하였으니...
등주의 군사들은 일촉즉발의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창끝이 소서노의 본선을 향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소서노는 대의를 위해 단 세 명의 시위만을 거느린 채 맹선(盲船)의 발판을 내려 땅을 밟았다.
설백천은 손을 들어 군사들의 공격을 제지했으나, 그의 손은 여전히 자루가 긴 패도(佩刀)에 머물러 있었다.
설백천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천둥같은 그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만도한데, 소서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의 매서운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소서노는 두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증명해 보인 뒤,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맹주 설백천이시여. 이 소서노가 소백하를 떠나 이곳 등주에 이른 것은 결코 그대의 영토를 탐하거나, 이 풍요로운 항구에 칼을 겨누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녀는 등주항 너머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눈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 저 멀리 따뜻한 남쪽의 삼한(三韓)의 땅이오. 새로운 터전을 찾아 대이동을 감행하는 여정 중, 잠시 거친 풍랑을 피하고 지친 숨을 고르기 위해 그대의 문을 두드린 것뿐입니다. 우리는 단 한 자루의 칼도 등주의 군사를 향해 뽑지 않을 것이며, 내일의 해가 뜨면 다시 돛을 올릴 것입니다.”
소서노의 진정성 어린 태도와 당당한 기개에 설백천의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 서서히 풀렸다. 참모들의 반대 섞인 눈빛에도 불구하고, 설백천은 패도에서 손을 떼고 탕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부보다 기개가 높은 여군주로다! 조국의 땅을 떠나 새로운 대륙을 열겠다는 그 기상에 내 어찌 박하게 굴겠는가.”
등주의 맹주 설백천은 통이 큰 우두머리의 면모를 과시했다.
“등주의 맹주시여. 부탁이 있소이다. 우리 1만 명의 어하라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해주실 수 있는지요? 그리고 내일 봉래산에 올라 제(祭)를 지낼 수 있도록까지 편리를 봐주신다면 그 값은 제가 톡톡히 치러드리리다.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어서들 내려오시오.”
“어서 이리 들어와서 식사를 하시오.”
“따뜻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시오.”
등주항을 지키는 군사들과 백성들은 설백천의 명령에 따라 어하라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등주 군사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천 장의 두꺼운 군용 모포와 갈대 가마니가 아낌없이 지급되었고, 어하라 백성들이 찬 바닥의 기운을 피할 수 있도록 광장 곳곳에 마른 짚단이 깔렸으며, 10보 간격으로 거대한 모닥불(지름 2미터에 달하는 화로) 백여 개가 설치되어 항구 전체를 밤새도록 따뜻하게 데웠다.
대규모 취사도 시작되었다. 군량미로 비축해 둔 묵은 쌀과 기장이 솥마다 가득 담겨 김을 뿜어냈고, 등주 연안에서 갓 잡아 올린 소금에 절인 생선과 돼지고기가 가마솥에서 푹 삶아져 나왔다. 굶주린 이들을 위해 따뜻한 고기 국물과 누룩으로 빚은 도수가 낮은 가양주가 보급되어, 백성들의 언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3월의 매서운 바닷바람을 몇 시간씩 버텨내야 했던 아이들은 따뜻한 국밥에 웃음기가 되살아났고, 노인들은 모닥불가에 앉아 시린 손을 녹였다. 소서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설백천에게 감사의 잔을 건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제는 무주공산이 된 발해만 난하 어하라 국의 비밀지도와 대박에 싣고 온 수만 근의 고품질 철괴(鐵塊)가 등주항의 맹주, 설백천에게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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