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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하늘, 내 안의 부처

기사입력 2025.10.2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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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조선의 몰락한 양반 최제우는 천주교 박해의 광풍 속에서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외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그로부터 천 년도 더 이전, 인도의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았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 동서양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두 사상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으며, 초월은 내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러나 이 유사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숨어 있다.

     

    동학의 시천주는 "하늘을 모신다"는 의미다. 최제우는 득도의 순간 천주로부터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만남이었다. 하늘이라는 인격적 존재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와 거하며, 인간은 그 하늘을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에는 하늘의 기운이 지금 임하시니 영원토록 잊지 않고 모든 일을 이루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다. 이는 명백히 관계적이다.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 모시는 자와 모셔지는 자의 구분이 있다.

     

    반면 여래장 사상은 철저히 비이원적이다. 중생과 부처는 본래 다르지 않다. 번뇌에 가려져 있을 뿐, 우리 마음속에는 이미 완전한 부처의 성품이 갖추어져 있다. 깨달음이란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재한 것을 발견하는 일이다. 선종의 스승들은 묻는다. "부처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답한다. "삼근육척(三斤六尺), 마른 똥막대기!" 부처를 멀리서 찾지 말라는 것이다. 섬김도 모심도 필요 없다. 다만 망상을 버리고 본래면목을 보면 그뿐이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천주는 19세기 조선이라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의 부패, 외세의 침략, 천주교 박해로 얼룩진 시대. 양반과 상놈, 남자와 여자, 적서의 구분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던 시대에 최제우는 선언했다. 모든 사람이 천주를 모신 존재이므로 귀천이 없다고.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깃발 아래 모인 민중들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로 봉건 질서에 맞섰다. 시천주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무기였다.

     

    여래장은 다른 길을 걸었다. 기원전 인도에서 시작된 이 사상은 중국과 한국을 거치며 수많은 사원과 경전, 고승들의 법문 속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세상 밖의 일이었다. 출가한 수행자들이 산문을 닫고 좌선하며 자신의 불성을 관조하는 일. 물론 불교도 자비를 설하고 중생 구제를 말했지만, 그 본질은 현실 변혁보다 개인의 해탈에 있었다. 사바세계는 괴로움의 바다이며, 진정한 자유는 윤회를 벗어나는 데 있다. 여래장은 이 세상 너머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옳은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천주가 묻는다. "어떻게 이 부당한 세상을 바꿀 것인가?" 여래장은 묻는다.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가?" 전자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며, 후자는 존재론적이고 심리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사회에서 두 사상이 다시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여래장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참여불교를 펼쳤다. 모든 중생에 불성이 있다면,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는 명상과 수행의 측면을 강화하며 개인의 영성 함양을 강조하고 있다. 시천주의 사회 변혁 정신과 여래장의 내면 수행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다.

     

    어쩌면 21세기는 이 둘의 통합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구조와 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20세기의 실험들을 통해 배웠다. 동시에 개인의 깨달음만으로 구조적 불평등과 폭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시천주가 가르치듯 우리는 내면의 하늘을 자각하여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여래장이 가르치듯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최제우는 주문 속에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 했다.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렀으니 크게 내려주시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는 하늘에 기도했지만, 동시에 그 하늘이 이미 자신 안에 있음을 알았다.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는 오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존귀함을 말하는 것이다.

     

    내 안의 하늘과 내 안의 부처. 두 개념은 다른 옷을 입고 있지만 같은 진리를 가리킨다. 초월은 멀리 있지 않으며, 신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문제는 그것을 자각하느냐, 그리고 그 자각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이다. 시천주는 그 신성함으로 세상을 바꾸라 하고, 여래장은 그 본성을 깨달아 자유로워지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통합이다. 내면의 하늘을 경외하며 동시에 세상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 본래의 불성을 자각하며 동시에 이웃의 불성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두 사상이 우리에게 건네는 공통의 메시지가 아닐까.

     

    안과 밖, 하늘과 땅,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에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시천주와 여래장은 각각 다른 길로 우리를 그 경계 너머로 안내한다. 어느 길을 걷든, 중요한 것은 걷는다는 것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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